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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당시에 편찬 간행 되었던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세조때 다시 편집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한글 변천을 살피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조선 초기에 유봉 된 중요 견천이 취합된 것이므로 당시 불교경전의 수용태도를 살필 수 있는 자료 이다.
한글창제 동기론 가운데 첫째로 지적한 고유한 문자를 가지지 못한 국가적 체면과 민족의식에 대해 살펴보면, 고대 국가 성립 시기에 수나라나 당나라와 같은 중국의 큰 나라들과 당당히 싸울 수 있었던 삼국시대와, 당나라의 야심을 물리치고 최초로 민족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말해지는 통일신라시대
월인석보』는 조선조의 세조가 부왕인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 그리고 요절한 세자 덕종(德宗)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것이다. 『월인석보』는 『月印千江之曲』과 『釋譜詳節』을 합해서 편찬한 책으로, 정음으로 이루어진 산문 문학의 효시이다. 이는 세종과 세조 양대에 걸쳐 이룩
증보 수정하여 간행하였다. 당시 편찬에 종사한 사람은 신미(信眉),수미(守眉),설준(雪竣),홍준(弘濬),효운(曉雲),지해(智海),해초(海超),사지(斯智),학열(學悅),학조(學祖) 등의 고승과 유학자인 김수온(金守溫) 등 11명으로, 이들은 당대의 불교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15,16세기의 정음문헌은 거의가 중앙의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이 간행한 석가모니의 가계와 그 일대기를 기록한 책.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당시 김수온(金守溫) 등의 도움을 받아 편역한 책이다. 책의 명칭 및 편찬동기와 간행시기, 그리고 편자에 대해서는 ≪월인석보≫(별항) 권1에 있는 〈석보상절 서(序)〉와 〈어제월인석보서〉에